모심은 안에 계시는 ‘검얼’이요, 밖으로 퍼지는 ‘숨짓’이니,
한세상 사람들이 낱낱으로 알아 안 옮기는 것이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
수운 최제우¹
두 눈을 뜨고도 못 보는 게 있다. 한눈에 알아차려야 한다. 이의석의 작품들은 빈틈의 미술(美術)이요, 사이의 마술(魔術)이며, 옹고집의 술수(術數)이다. 이 말을 되짚어 보면, 빈틈을 노리고 파고든 기념비 조형(造形)이요, 사이를 벌리며 외치는 리얼리티의 상징이며, 불편을 들이미는 생활 예술의 술수적 옹고집이다. 다시 꼬집어 말하면, 빈탕의 텅 빈 때빔(時空) 따위를 뒤흔들어 ‘있’(有:存:在)의 자리/터에 세우는 기념비요, 사이 존재들의 비좁은 마음을 열리게 한 뒤 눈길을 끌어당기는 힘이고, 그런 터 기념비의 끌리는 힘이 술수를 부려 ‘제나’(ego)의 욕망을 굳세게 솟구치도록 밀어 올리는 기이한 ‘뚝심’이라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은 술수 부리는 뚝심의 미학이다. 생활 미학의 뚝심은 힘이 세다. 이것은 역설이다. 사실 생활 영역의 사물들은 견고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눈길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지도 않다. 잘해야 삶과 주변을 이루는 그 사이, 그러니까 ‘~과’로 볼 수 있는 이것과 저것의 ‘이음새’ 정도일 뿐이다. 이음새의 ‘새’는 잇는 사이다. 그는 ‘사이’를 꿰뚫는다.
예민한 뚝심일까, 무뚝뚝한 뚝심일까. 아니면 힘센 뚝심이 맨손의 맷집으로 ‘짓됨’(變化)을 이룬 미학일까? 그의 조형 작업은 거리에, 유흥가에, 윤락가에, 원도심과 신도시의 경계에 있거나 혹은 있었거나, 때로는 더러 아주 오래되고 낡은 것들로부터, 아니 심지어 사라지는 것들로부터 되살아 왔다. 본래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질서’가 아니었기에 어떤 것들은 자취/흔적일 뿐이고 어떤 것들은 부서지는 것들이었다. 헐거운 조각들이 말끔한 꼴을 갖추고 들어선 전시장은 그래서 눅눅한 삶의 숭고로 빛났다. 《서로 믿고 돕는 정다운 이웃이 된다》의 작품들이 그랬다. 전시에 출품된 작업은 무턱대고 들이밀었던 생활 오브제들의 숭고한 ‘일어섬’(起立)이었다. 보통은 길가에, 주차장에, 건널목에, 출입구에 ‘금지’의 구조물로 설치한 길말뚝(bollard:볼라드)의 형상들인데, 흥미롭게도 전시에 출품한 ‘작품들’은 그런 길말뚝의 페르소나였다. 일상의 빈틈에서 길말뚝의 역할을 수행하는 조각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진짜 길말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믿음이 상실된 자리에서 ‘적대적 이웃’의 거리를 확보한 어설픈 길말뚝은 오직 그들만의 질서를 창조한다. 그래야 삶이 ‘안녕’할 수 있으니까.
이렇듯 이의석의 ‘조각난’ 작업은 ‘인내천’(人乃天)을 ‘인내천’(人乃賤)으로 사유한 ‘경계인’ 철학자 윤노빈의 『신생철학(新生哲學)』을 떠올린다. 앞의 인내천에는 ‘하늘 천’(天)이 있고, 뒤의 인내천에는 ‘바닥 천’(賤)이 있다. 윤노빈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수운의 가르침을 뒤집는다. ‘바닥이 곧 하늘’이라는 새로운 혁명의 화두, 그러니까 ‘바닥과 하늘은 하나’라는 혁명적 인식을 펼친 것이다. 이의석이 들고 온 생활형 오브제들은 ‘바닥 천’(賤)의 미학이다. 흔히 밑바닥 살이(人生)라고 말하는 그 ‘밑바닥’으로부터 그의 조형미학은 새로 나고 새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윤노빈의 ‘신생’(新生)은 ‘새삶’이요, ‘새남’, ‘새솟구침’의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의석의 작품들도 새 솟구침의 조형 언어를 보여준다. 이때 ‘새’는 새로움, 사이, 비상, 그리고 ‘다시’를 뜻할 터. 바닥이요 나락인, 그래서 낮고 낮은 ‘바닥’(賤)을 ‘하늘’(天)로 솟게 하는 것이 이의석의 ‘신생’(新生)이다. 윤노빈의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전시에 솟구친 작업은 여전히 ‘길말뚝’으로부터 이어진다. 어느 곳 어떤 장소들의 이미지에서 불현듯 솟아올라 한 줄의 ‘매임’으로 잇대어 묶인 길말뚝. “매다·매이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고정된 것에 끈이나 줄 따위로 잇대어 묶이다.”라고 정의되는 ‘매임’의 의미를 되묻는 작업이랄까.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업은 < 안녕질서(安寧秩序): 바리케이드 >이다. 글쓴이는 그가 “시가전이나 농성 따위에서, 적이나 진압하는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흙이나 통, 철조망 따위를 사용하여 임시로 만든 방벽”으로 풀이되는 바리케이드(barricade)를 있는 그대로 풀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시 제목도 “安寧秩序 안녕, 질서”이지만, 교과서에서 강조하는 ‘안녕질서’ 따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겨울을 생각해 보라. 사회 질서는 바르지 않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도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그것을 책임져야 했을 대통령이 스스로 내란을 일으킨 시대였다. 코미디가 아니라, 그것은 공포였고 두려움이었으며 전 국민을 통째로 공황에 빠트린 충격이었다.
내란을 진압한 것은 국민이었다. 시민이었다. 바닥이었다. 내란에 맞서 싸운 이들은 길말뚝의 페르소나였다. 힘으로 억누르는 정치는 겉보기와 달리 굳세지 않았다. 시민의 뚝심은 힘이 셌다. 결국 내란은 끝났고 대통령은 파면당했다. 질서는 국가 권력이 아니라 시민의 외침으로부터 솟아 올랐다. 이의석의 신작은 ‘방벽’에 가시 돋친 외침을 심는 일이다. ‘안녕, 질서’에 빈틈을 내는 일이요, 길말뚝의 경계를 허물고 누구나 그 사이로 드나들 수 있게 하는 혁명이다. ‘누구나’라는 주체성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아주 위험한 말이다. 그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울뿐더러 특정될 수도 없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구나’의 정체성은 그가 로 제작한 인조 잔디에서 더 확실해진다. 이 작품이야말로 완전한 바닥이 아닌가. 낱낱이 살아서 온통을 이루는 삶이지 않은가. 수운은 “한세상 사람들이 낱낱으로 알아 안 옮기는 것”이 곧 우리 안에 계시는 ‘검얼’(神靈)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은 자리에 있는, 바닥으로부터 솟구친 사물들을 신령하다고 고백해야 하리라.
그렇다.
바닥이 곧 하늘이다!
1. 수운 최제우, 『동경대전(東經大全)』「논학문(論學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