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석으로부터 볼라드(bollard)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차량 진입을 막거나 주차 금지를 위한 용도로 도심과 동네 가릴 것 없이 무질서 속 질서를 띠며 공공연하게 놓인 그것들이 볼라드였다. 그에게 볼라드는 지난 개인전 《하날 물으니 열을 답하네》(꿈꾸는 예술터, 2023)로 갈무리된 이의석 유니버스에서 석연치 않게 남은 그 무엇이었다. 볼라드가 이의석에게 물성 연구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키는 대상물임은 분명해 보이는데¹ 몇 년간의 한 세계가 일단락되었음에도 잔류하고만 이유에 대해 거듭 물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그 답은 말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이의석을 만나고 돌아와 영어사전에서 볼라드를 원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들어보았다. 발라드[ˈbɑːlərd]에 가깝게 들리는 소리로부터 무심결에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떠올랐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아드레날린을 위한 볼라드」-〈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이런 순의 연쇄가 연이었다. 무의식적 연쇄이자 볼라드 곁으로 재구성되는 내 기억의 구심력에 가깝겠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이의석의 이접(異接)도 만만치 않다. X 배너에서 신목(神木)을 떠올리는 그 또한 겅중겅중한 연상 사이의 벌어지려는 틈을 조형으로 메운다. 사실 그렇게 보일 뿐이지 사이의 조형이라고 하는 표현이 적확하지는 않다. 그에게 ‘사이’는 메워야 할 빈 공간이지 않고 뭍힌 문제를 점화시킬 가능성의 지대다.
예컨대 이렇다. 성남시 희망대공원에 1976년에 건립된 시민헌장비 1열에 새겨진 글귀는 이의석의 개인전 제목인 “서로 믿고 돕는 정다운 이웃이 된다”이다. 성남시에서는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다음을 실천한다는 취지로 다섯 개의 헌장을 비에 새겼다. 성남 시민헌장비 전문은 이의석의 2023년 전시에서 〈무너지는 것을 위한 기념비〉(2023)의 기단에 나무판에 새겨져 설치되기도 했다. 전문에서 1열이 추출되어 《서로 믿고 돕는 정다운 이웃이 된다》 라는 전시명이 된다는 것으로도 이번 전시는 지난 세계와 연동된 또 하나의 유니버스가 움트고 있음을 방증한다. 지난 개인전은 기념비의 재구조화를 통해 염(念)을 이루는 형이상(形而 上)과 이에 못 미치는, 혹은 미칠 필요 없는 세속을 혼융하고 있었다면 2024년 그의 시선은 더 아래로 향했나 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로서 미묘한 관계성을 맺고 엮는 볼라드를 문제로 제기한 것이다. 사실 볼라드가 도열하는 전시와 정다운 이웃을 향한 시민헌장은 치열하게 툭탁댄다. 그렇기 때문에 곁을 허용치 않겠다는 강렬한 표식인 볼라드와 정다운 이웃의 헌장을 전시장에서 눙치는 그만의 방식은 대단히 특징적이다. 그는 세상의 적대(敵對)를 자체로 수긍하고 미미크리(mimicry) 방식으로 형태를 옮겨오면서도 첨예한 적대를 결코 형해화(形骸 化)하지는 않고 있다. 유연해 보이지만, 분명 보이는 것만큼 유연화시키지는 않는다.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적대의 필연성을 개념에서부터가 아닌, 실재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적’ 혹은 ‘적대’는 타파해야 할 대상이나 문제가 아니라 실존의 차원에서 관계적 조건을 형성한다. 정다운 ‘이웃’의 설정이 진정 정치적·시민적 성숙의 기호로 고양되는가 묻는다면 그 누구도 쉽게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이웃’의 지척에 적대가 자리함을 인정할 때 사회가 총체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의석의 전시로 돌아온다면, 볼라드가 바로 이 갈등성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그는 이 표식을 그대로 전시장에 이식하지 않는다. 있던 것들의 맥락에서 그가 개입해 들추어낸 정념에 드라이브를 거는데, 있던 것들로부터 아주 멀어지지는 않으면서도 재맥락화하는 솜씨에는 모종의 쾌감이 느껴진다. 전시장의 외곽에서부터 생활예술의 한 형태의 발현처럼 다가오는 〈입간판〉(2024)을 배치하여 낯설음을 예비하고, 전시장 안으로 진입하게 되면 좁고 긴 전시 공간 선데이애프터클럽에 〈규제봉1,2,3, 4〉(2024)과 〈볼라드1,2,3〉(2024)을 좌우 도열시킨다. 기성품 볼라드가 점유하는 물성의 효율화와 세속적 생활 세계 속 볼라드로 간주되는 온갖 빼어난 낯선 안목의 (부)조화는 세상이 그러하듯 이의석의 전시장에서도 전염되어 드러난다.
규제봉과 볼라드들의 열주 끝 마방진에 자리한 〈서로 믿고 돕는 정다운 이웃이 된다〉(2024)는 기념비적 수직성으로 고양되고 있으면서 입구 우측벽에 자리한 〈변신〉(2024)에 의해 대칭성이 미묘하게 깨지고 있다. 서울과 성남 고가 아래 누군가 낙서로 남긴 ‘변신’이라는 래커 스프레이 글씨를 최대한 고스란히 따라 다시 옮겨 쓴 〈변신〉은 〈서로 믿고 돕는 정다운 이웃이 된다〉가 지닌 수직성을 불식시키지는 않으면서도 무게 중심을 교란시켜 공간을 기우뚱하게 만드는 신묘한 힘을 발휘하는데, 이게 진정 그럴 문제인가는 의문은 전시에서도, 혹은 본연의 생활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 두 글자로 쓰인 ‘변신’은 전시장에서도 시 경계에서도 카프카의 「변신」과 연동되어 의미보다 물음표에 가깝게 치환된다. 또 그 아래 놓인 주황색의 박스 구조물 위에 화분의 형태가, 그 위에 돌의 형태가, 다시 화분의 형태가 얹어지고 화룡점정 꽃 한 송이가 꽂힌 〈볼라드 4〉를 보면서 어느새 조형의 형태 끝단에서 고가품 에르메스의 주황 패키지 박스를 떠올리고 마는 강렬한 세속의 힘을 어떻게 단호히 끊어낼 수 있을까? 아니, 끊어내기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여기 전시는 답한다. 예술의 개입은 그리 큰 힘이 될 수 없을지라도 감각으로 몸에 익힌 세계에 균열을 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용함, 잉여, 여분으로 간주되더라도 세계를 닮아있는 와중에서 오는 변신(변태)는 예술적 상상력에서 오는 빗금질이자 담금질의 발현된 양상이다.
내 연상의 연쇄를 이루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의 세속적 운율,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가 취하는 점진되는 고양은 그가 볼라드를 취하는 것처럼 이접의 연상에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킨다. 나의 연상과 그의 연상이 동일하지 않으나 나와 그의 연상에는 동류의 성질이 있다. 그는 ‘도심의 이율배반적 풍경’에 대한 해석을 ‘치밀한 공간’ 혹은 ‘세속적 생활’²의 병치로 풀이하는 듯하다. 바로 이 ‘치밀한 공간’과 ‘세속적 생활’에 대한 전략적 제휴의 극적인 외연화 중 하나로 이번 전시에서 풀어낸 볼라드들은 퍽 적절하게 다가온다. 또 하나의 유니버스는 이렇게 시선의 이동과 확대로부터 파생된다. 조형적 교감신경을 흥분시키고 혈압을 상승시키 고 기관을 확대하는 물화된 사물이 지금 현재 보이는 이의석의 볼라드(들)이고, 이의석의 볼라드로부터 「아드레날린을 위한 볼라드」로 연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은 이율배반적 풍경이 우리 세계인 바로 그만큼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1. 이의석은 필자와의 대화에서 볼라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카데미에서의 교육에 대한 반항으로 피해왔던 것들에 대한 뒤늦은 자각에서 비롯한다고 밝힌 바 있다. 2024년 8월 22일 이의석 작가와의 대화에서 발췌한다.
2. 그의 표현을 원문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도심의 풍경이 아닌 이율배반적 풍경에 집중한다. 도심의 같은 장소지만 낮과 밤이 주는 다른 풍경이나 흔히 지나치던 장소 속 숨겨져 있는 ‘치밀한 공간’ 혹은 ‘세속적 생활’같은 것을 끌어와 작업한다.” 이의석 홈페이지에서 인용한다. (https://leeeuiseok.com/index#WOR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