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을 세운다는 것
길을 걷다 보면 무심결에 지나치는 사물들이 있다.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세워진 가로등과 여타의 표지판, 가로수, 보도블록과 같은 무수한 장치들이 알고 보면 나의 걷기에 동참하고 있다. 볼라드Bollard 역시 그중 하나이다. 볼라드는 주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세워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구조물로 활용된다. 가장 흔한 소재이기에 쉽게 눈에 들진 않지만, 다종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며 자리를 지킨다. 이러한 볼라드는 이번 전시 《서로믿고돕는정다운이웃이된다》에서 군집을 이루며 등장한다.
볼라드들의 군집은 언뜻 보기에 하나의 정돈된 질서를 구축하는 것 같다. 위험 요소로부터의 분리와 그로부터 구축된 단정한 동선을 통해 우리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입구에서부터 작동하는 볼라드의 친절함은 공간 끝에 다다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질서로부터 유도된 미묘한 불편함을 이내 감지할 수 있다. 가령 단순히 걸으면 될 것만 같았던 일직선의 동선은 성인 한 명이 지나다니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을 정도의 좁은 간격을 유지하고, 애매한 거리에 놓여진 볼라드들은 잔디를 밟을지 말지 고민하게 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결국 은근한 조심성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부터 우리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감각하게 된다.
바닥에 놓인 볼라드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형상으로 세워져있다. 흔히 볼 수 있는 기성 볼라드부터 미처 볼라드라고 말하기 난처한 모양의 수직적인 무언가까지. 도심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이미지들로 세워낸 이의석의 볼라드들은 본래의 기능으로부터 벗어난 사물들의 무분별한 조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성을 담보하고 있다. 콘크리트에 꽂아놓은 조화 한 송이나 울퉁불퉁한 모양의 시멘트 덩어리가 불법 주차를 막아주는 기성 볼라드와 기능적으로 대구를 이루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볼라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누구든지 세울 수 있는 평등의 볼라드이다.
‘정상성’이라는 이념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인류의 역사는 자신과 다른 것들에게는 배제와 침묵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 같은 미셸 푸코(Paul-Michel Foucault) 의 통찰은 우리에게 이상적이라고 간주되던 개념들-정상, 절대성, 진리 등-이 그저 당대 지식 체계의 담합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동일한 맥락에서 이의석의 볼라드는 우리가 ‘질서'라는 이상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드는 도구로 작동한다. 즉, 볼라드를 통해 진정한 질서가 무엇인지 반문하며, 질서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재해석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 볼라드는 질서라는 표상의 탈을 쓴 무질서의 단면과도 같다. 질서를 형성하는데 일조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그의 볼라드는 무질서 혹은 탈질서, 그렇기 때문에 뒤틀린 질서를 형성한다.
이의석은 볼라드와 삶 사이의 관계로부터 유사성을 발견하고, 둘을 연결 짓는다.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낸 구조물이 되려 불편함을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의 작동은 마치 우리 주변의 삶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서로 믿고 돕는 정다운 이웃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일관되게 정다운 사람으로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인간적인 모순은 볼라드가 지닌 이중성과 유비를 이룬다. 마침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모순만이 남은 분열된 공동체이다. 이곳에서 모든 것은 비록 파편으로 남게 된다. 그러나 분열의 이면에는 각 개체의 의미를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공동체가 형성될 가능성 또한 공존한다. 그렇다면 다시 전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에게 진정 ‘서로 믿고 돕는 정다움’이란 파편들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글_장주연)